종종거리며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그 틈을 분주히 비집고 다닌 차바퀴에

한껏 더럽혀진 눈을 보며 되뇌인다

 

소복히 눈이 내리던 그 밤을 생각하면

순결하고 정결한 그저 순백의 고요한 세상밖에

그려지지 않는다고

 

그 밤의 눈처럼 나도 참 하얬다

하늘에 뜬 초생달처럼 여리고

눈에 비쳐 흐르는 가녀린 달빛처럼 빛나던

 

이런저런 일로 때가 묻기 전까진

그만저만한 일로 나를 헤집어 놓기전까진

만신창이가 된 나를 종이관에 담아 덮어두기 전까진

 

나중엔 질척이고 또 질척였다

꼴에 하얗고 순수한 했던 그때 생각이 나서

그 시절의 나를 놓을 수가 없어서

 

기억 속에서조차 그런 나를 지워버리면 

어느 순간에 나는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아서

 

부질없는 일이었다 

 

종종거리며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그 틈을 분주히 비집고 다닌 차바퀴 위에

한껏 더럽히고 짓이겨진 눈을 보며 되뇌인다

 

오늘의 이 더럽혀진 내 마음도 

봄이오면 아무렇지 않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봄이오면 아무일도 아니게 될 것 같다고

 

Posted by 설흔 :

근황

2021. 4. 27. 17:05 from 카테고리 없음

승리도 패배도 알지 못하는 회색 황혼 속에 살며 큰 것을 즐기지도 않고 많은 고통도 겪지 않는 불쌍한 영혼들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는

실패에 막혀도 영광스러운 쟁취하기 위해 '큰 일을 감히 실행하는 것(dare mighty things)'이 더욱 훌륭하다 라고 이야기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연설의 한 조각을 벗삼아, 마음 한켠이 무너지고 자신감이 쇠락하는 이 시절을 묵묵히 그리고 굿건히 견뎌내고 있다. 

 

앞으로 한달후면 한국으로 돌아온지 만 2년이 지난다. 코로나 상황이라고 뭉뚱그려 덮어두기엔 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

Posted by 설흔 :

 

정남향에 커다란 창을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꽤 높은 층에 있기 때문인지 새로 얻은 집은 전에 없이 볕이 잘 든다. 

해질녘 쇼파끝에 덩그러니 앉아서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창틀의 그림자와 반쯤 말라 죽어가는것 같은 이레카 야자화분위로 삐죽 솟은 잎의 얼금얼금한 그림자가 거실 깊숙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바닥의 긴 타일을 눈금삼아 그림자가 얼마나 드리우는지 셈 해볼 겨를도 없이 해는 져버리고 컴컴해진 거실 벽을 짚고 일어서 나는 불을 켠다. 서울에선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기서 내가 보는 겨울녘 노을은 유난히 더 붉고, 뜨겁고, 그 속엔 애잔함 축축하게 깃들어 있다.

 

내 나이를 한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만큼 어려서 기억조차 희미해진 어린시절의 먼 과거로부터 이른 사춘기에 접어들어 더는 집밖의 어두운 골목길이 무섭지 않은 순간이 올 때까지 나는 이렇게 바닥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몇시간씩 내려다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밀어젖히기도 힘들정도로 무거운 인디고색 철제대문을 목에건 열쇠로 겨우 따고, 낡아서 끼익대는 얄팍한 알루미늄 새시의 현관을 지나면 텅 빈 집이 나를 반겼다. 엄마가 출근전에 겨우 챙겨놓은 >작은 소반에 수저를 얹어 볕이 가장 잘 드는 거실 끝에 옮겨놓고, 우뭇가사리가 꽉 들어차 있는 것만 같은 먹먹한 공간속에 우두커니 나를 앉혀두고 그림자를 보는 놀이를 했다. 

 

그림자 놀이는 예컨대 이런것이었다. 해가 짧아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바닥에 깔린 복잡한 아라베스크 무늬의 주황색 카펫속 한땀 한땀 수놓아진 알 수 없는 프랙탈 패턴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봄부터 늦여름까지는 흰 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강렬한 햇볕 속 일렁이는 아지랑이 속 희붐한 입자들을 세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겹거나 눈이 따가우면 잠깐 책을 펼쳐 숙제를 하기도 하고, 저금통 밑의 검은 고무가 다 헤질때까지 저금통을 열고 닫으며 동전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해가지면 어둠이 스민 거실을 더듬어 엄마 아빠가 들어오는 현관 입구 신발장 위의 전구 스위치를 톡 하고 켜두고, 이불을 돌돌말아 쇼파위에서 잠이 들었다. 내가 방에 들아가 잠을 자고 있으면, 엄마 아빠는 그마저도 곤히 자는 아이 잠을 깨운다며 들어와보지도 않으셨으니까. 방에 들어가 자면서 수십날 수백밤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보았지만 엄마 아빠는 자는 나를 깨워 퇴근길의 분주한 냄새가 깃든 찬 뺨을 부벼주시거나, 거친 수염을 문질러 깨우며 닭다리 한 쪽을 똑 떼주시며 한입을 권하는 일은 해주시지 않았다. 

 

방 밖이 시끌시끌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다음 날 점심이 차려진 소반에는 닭이며 갈비며 줄줄이 비엔나 소세지 등 내가 좋아할 법한 반찬들이 수북히 올라왔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들은 나에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선잠에서 깨어나 방으로 쫓겨가는 내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바램만이 있었으므로.

 

때로는 이런 집에 돌아와 이런식으로 우두커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어 하교길에 남들은 피하는 봉사활동도 해보고 시험을 일부러 망쳐 나머지 공부반에도 들어가봤지만 그래봤자 내가 벌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일년에 몇 주 뿐이었다.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시는 우리 부모님은 평생동안 미래의 한 날 한시에 오늘의 행복을 저당잡힌 채로 열심히 일하셨던것 같다. 입는 것, 먹는 것, 노는 것, 그 외 모든 것 까지 당신들에겐 천원짜리 한 장, 만원짜리 한장의 소비가 문제 였다기 보다는 오늘이 주는 풍요로움을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서 마음가짐의 느슨해짐을 경계하며 평생의 행복과 기쁨을 내일과, 다음 세대와, 다음 번으로 미루시며 살아오셨다. 이젠 빛마저 다 바래어버린 두툼한 칸나앨범 사진속의 엄마 아빠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넘게 똑같은 코트를 입고, 똑같은 양복을 입고, 똑같은 넥타이를 메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마음이 이해 되어서는 안 되는 어린 나이부터 엄마 아빠가 안쓰러워 착한 아들로, 떳떳한 자식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 

 

나는 서운함을 느낀다. 외로움과 고독함이라는 아주 근사하고 고상한 단어로 표현되는 마음이 아니라.

아주 작고, 정말 유치하고, 하찮고, 보잘껏 없는 서운한 마음이 평생동안 사라지지가 않음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간의 정과 사랑이 기체라면 얼려서 손으로 만져보고 싶고, 액체라면 용기에 담아 마개를 꽉 막아두고 싶고, 고체라면 한아름 들어 그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예술과 철학에 더 깊게 들어갈수록, 또 인간관계를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동여매는 일 정도로는 이런 마음이 해결되지 않음을 더 잘 알게 될수록 서운함은 더 단단해 진다.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혹은 부모님에게 이 이야기를 담담하고 나지막히 이야기 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내가 울지 않을 자신도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어줄 미지의 청자를 울리지 않을 자신은 더더욱 없어 그 순간을 유예해왔다. 언젠가 그런 서운함이 다행이 저절로 사라진다면 이런 마음은 아무도 몰라도 될 것이고, 사라지지 않더라도 이제는 괜찮다. 하지만 가끔 불쑥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하고, 왜 한번도 나를 깨우지 않으셨는지에 대해 묻고 싶기도 해서 나에게 글을 남겨두려고 한다.  

 

마흔의 문턱을 넘는 12월 노을을 보면서 나는 괜찮음을, 그럭저럭 괜찮아야 함을 다시한번 스스로 다짐한다.

Posted by 설흔 :


곡이 가진 아름답고 화사한 주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연주때문에 

별 생각 없이 연주하면 여느 CF 에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곡이 되어버리고

너무 비장하게 시작하면 베토벤 소나타 비창 2악장의 서두처럼 너무 장엄한 곡이 되어버리고 

한껏 기교를 넣어 연주하면  보기엔 예브지만 작가의 의도가 잘 읽히지 않는 현대미술 작품처럼 느껴지는 곡.


결혼식장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주변 소음에 내가 상상했던 사근사근한 디테일은 모두 사라지고, 그냥 크레용으로 그린것 같은 흔적만 

겨우 남겨져 있었던것 같다.


예전엔 이 곡이 참 달콤하고 감미로운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눈물 맛 같은 미열이 담긴 옅은 짠맛 같은 느낌이 난다.

Posted by 설흔 :

외부의 간섭과 통제가 없이 내 세계 안에서 내가 정의한 타임테이블로 하루를 굴리고, 내가 오롯히 결정한 가치체계를 

추구하며 시간을 보낸다. 절대 다수의 타인이 인정하기 힘들고, 이해 하기 어려운 온갓 추상적이고, 이상하며 모호한 것들이 

부유하는 세계속에서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향해 나의 가치와 나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려는 공허한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6년여를 지내고 나니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매일을 견디고 또 견뎌내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외곩수가 되는지, 

또 가끔씩은 정말로 미쳐버리는지도 이제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의 내 안의 많은 것들이 한데 뭉쳐져 한 마디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때의 나는 나는 집안의 불을 끄고 타들어가는 향초의 불꽃과 벽에 반사된 일렁이는 그림자를 밤새 물끄러미 바라보며 

새 태양이 떠올라 나를 옥죄는 하루가 강제로 지나가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진 하루를 쫓아내고 아침이 오면,

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으로 나를 밀어넣어 볼 수 있으니까. 오늘은 더 괜찮은, 그리고 근사한 하루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완료가 주는 홀가분함이나 성취가 주는 뿌듯함을 느껴보기도 전에 가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일들을 준비하기로 했다.

몇년간의 고독이 깃든 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 가면 이러한 울적한 마음을 낫게하는 데에도 얼마간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Posted by 설흔 :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던 소설가 김하기는 숨 막히는 더위를 견디기 위해 기막힌 비법들을 고안했고,

동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가의 기지에 감탄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수감생활이 생각처럼은 나쁘지 않은것 같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구효서는 갇혀있는 친구의 마음을 이렇게 이해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콩국수 해 먹는 이야기를 썼는지… 나는 다 알 것 같다…. 

바깥에서야 굳이 혼자 웃고 울고 할 필요가 없지만 넌 혼자 뛰고 혼자 웃고 혼자 절망하고….. 그러겠지"


지인들이 때때로 나의 과한 표현에 대한 지적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내 말과 글에서 부가적인 요소들을 한가지씩 떼어내며 최대한 덤덤해지려는 노력을 했다.

혼자 웃고 울고 뛰고 절망하는 사람처럼 보여지고 싶지 않아서.


전직 대통령의 더럽고 차가운 감방생활에 대한 앵커브리핑이 자못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후벼파는 하루.



Posted by 설흔 :

 

思い出を忘れたいなら さぁあたしが 

消しゴムで消してあげるわ

安心しておやすみなさい 

 

凍えるような寒い朝も 揺れる大地も 

身体に刻まれた記憶があなたを強くするのでしょう

 

やがては土に帰ると分かっていても 

この気持ちはどうしたらどうしたらいいの 

 

あたしの歌は何にも力なんかないけど

あなたの心を少しだけ撫でるくらいなら出来るかも 

 

思い出を忘れたいなら さぁあたしが 

消しゴムで消してあげるから 

安心しておやすみなさい

Posted by 설흔 :

도망치고싶다

2016. 9. 15. 08:37 from 카테고리 없음

이쯤 되면 익숙 해질 만도 한데 부담감에
학회 발표를 앞둔 전날이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오늘은 새파란 하늘에서 깨진 유리 조각 처럼
따가운 햇볕을 맞으며 운하를 따라 걸으면서
다짐까지 했는데.

도망치고 싶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Posted by 설흔 :

대한민국 연예사 혹은 연애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한 문장을 꼽자면 아마도 

최무룡-김지미 부부가 이혼 하면서 남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가 아닐까.


애달픈 사랑을 자처하며 나의 부족하고 초라한 존재를 그이에게 짐처럼 안겨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도 많은 연인들이 아름다운 이별, 상처없는 관계의 종말을 꿈꾸며 한번 쯤은 떠올리게 되는 말.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저 말이 나의 인간 관계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저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Posted by 설흔 :

잘 자고 싶다

2016. 5. 22. 10:39 from 카테고리 없음


언젠가는 깊게 잠이 들까봐 방에 불을 켜놓고 잠자리에 들고

불안한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나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오겠지


허리가 아프고 목이 아프고 어깨가 결릴때 마다

이렇게 한 두줄의 글로 투덜대며 내 마음을 달래어 본다


 

Posted by 설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