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메리

2026. 5. 4. 14:21 from 카테고리 없음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에바 스트랫은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를 부른다. 에바는 인류의 존속이라는 거대한 무게 아래 자신을 조용히 그리고 기꺼이 마모시킨 인물이다. 12광년 너머 사지로 전문가들을 몰아넣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흔히 '완벽한 소시오패스' 혹은 '기계적인 괴물'을 떠올린다. 그 곁에서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나약한 인간미를 뿜어내는 그레이스와 대조될수록, 그녀의 냉정함과 내면의 악마성은 더욱 도드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 2분, 이 노래가 흐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에바의 심연을 마주할 수 있다. 그녀는 결코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의를 위해 사지로 향하는 이들과 그 비 인간적인 여정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팀원들을 향한 무한한 경외와 사랑을 품었기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무른 마음'을 스스로 도려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성을 포기해야 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선택. 그녀가 노래를 끝까지 잇지 못한 것은, 차마 다 절제해 버릴 수 없었던 한 조각 남은 인간성이 노래 가사에 부딪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진 않을까?

롤링스톤즈 매거진 인터뷰에서 이 곡은 해리 스타일스가 출산 직후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아이에게 건네는 마지막 5분을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 "저 멀리 나아가 세상을 정복하렴." 깜빡이는 생명의 등불 앞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남긴 축복은 곧 비극적인 작별 인사다. 에바가 이 노래를 읊조릴 때, 그녀는 어쩌면 사지로 떠난 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을지도, 혹은 죽어가는 자신의 인간성을 향한 마지막 조종(弔鐘)을 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문득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 역시 일생을 살며 천천히, 깊게 머무르게 하며, 가꾸어야 했을 사랑들을 너무나 짧은 시간 속에 지나쳐왔다. 이제 내게 남아있는 시간동안엔 그렇게 스쳐 지나간 감정들의 파편을 하나하나 집어 들어, 그 맹렬하고도 뜨거웠던 면면을 다시금 반추하고 추억하며 살고 싶다.

피천득은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세 번째 만남을 두고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이라며 생의 비가(悲歌)를 남겼다. 
그리워하면서도 못 만나고, 잊지 못하면서도 아니 만나고 사는 것. 때로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해 기어이 마주하고야 말지만, 결국 그 해후 끝에 짙은 후회를 남기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감내해야 할 인연의 가혹한 무게라면, 에바가 차마 끝맺지 못한 노래 또한 그 지독한 인연을 삼켜내는 그녀만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무언가를 절실히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조각을 떼어내 내던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소중한 조각을 도려내어 이 흉악한 세상에 맞서고 난 뒤의 사람은, 더 이상 사랑을 처음 시작했던 그 시절의 순수했던 존재일 수 없다. 그렇게 애써 지켜낸 세계 위에서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이 남기는 가장 아픈 흉터일 것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Posted by 설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