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를 가르쳐 주시던 강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너는 그림을 오래 붙잡고 있어도 네 감정이나 주관이 그림에 배어나오기 보다는 그저 빈틈없이 숨이 막히게
그려버릴 뿐이니 순수회화 전공은 어려울것 같고, 이대로라면 연필 소묘로 입시를 치루는 학교에도 지원하지
않는것이 좋겠다" 라는 평가를 내리신 적이 있다.
그때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지 못했지만, 포트폴리오 정리를 하다 거의 7, 8년만에 다시 그림을 꺼내어 보니
이 그림은 이런 정물을 대상으로 그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다 그려냈을 법한, 예의 가슴떨림도, 끈적간 감상도
없는 인공적이고, 무엇인가가 가리워져 그늘진, 그야말로 숨막히는 표현으로 일색된 그림이 맞는것 같다.
세월이 지나고,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이런 먹먹한 기분이 좀 지나가길 바라고, 정말 사람같은, 사람의 마음을
좀 더 가꿀 수 있기를 바랬는데 최근에 그려본 인체에서도 내가 원해오던 인체의 곰실곰실한 아름다움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것 같다.
내가 그림 속에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곤 해부학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사람을
종이 위에 잡아둘 만큼의 원근법과 빛, 양감을 드러내는 단순한 테크닉 뿐임을 깨달았을 때,
집에 돌아와 습기먹어 울고 있는 종이를 바닥 저편에 멀찍히 던져두고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다
다시한번 그 느낌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사람은 세월이 지나도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
어제의 달은 내가 본 어떤 팔월의 달보다 유난히 크고 창백히 질린것 같은 희뿌연 모습이었다.
애써 부정하고 싶어도, 녹녹치 않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보내며 학교 안팎으로 스무살 무렵까지 시달리다
마음마저 닳고 닳아 지치고, 헤어져 버리는 것이 일인 나와 내 또래 친구들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에
익숙하고 빠른 편이다. 한강의 남쪽에 있지만 강남은 아닌 곳에서, 우리는 100점을 맞기보단 80점을 채우는 일에
익숙해 지도록, 큰 비젼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큰 계획을 세우는 것 보다 하루하루를 잘 지키며 내 손에 잡히는
것들을 갈무리 해 두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라도록 교육받았다.
그것은 나와 내 친구들이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은 꿈이 없거나, 그를 이루기 위한 의지랄까, 악다구니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고, 다만, 현실감각과 주위를 살피는 눈치가 또래 친구들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사회에 실망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한 수단으로 '자기 분수'와 자기 몫'을
살피며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을 주위 사람들 사이에 재빠르게 재단하여 펼치는 일이 습관처럼 배어있는 셈이다.
그래도 포기가 쉽다고 해서 매번의 포기가 말처럼 쉽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수줍은 첫사랑이건, 애꿏은 중간고사 점수건, 여러가지 이유로 나의 기대와 바램과는 달리 일이 어그러져서
내가 아끼고, 지키고,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쳐 도망갈 때마다
나는 어제 처럼 높은 달을 올려다 보며 나 스스로를 욕하고 또 욕하며 눈을 치켜뜨곤 했는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모은 채로 목이 아플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면 뺨으로 뚝뚝 흘러 내렸을지 모를 눈물들을
가까스로 참아 넘길 수 있었다.
때때로 이러한 마음가짐이, 허튼 마음이 잡초처럼 자라지 않게 해 주어서 너무 고맙기도 하지만,
요즘 처럼 이것 저것 신경을 써야할 것들이 많고, 결연한 마음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감 있게 달려야 할 때면
좀처럼 마음을 바로 세우기가 어렵다.
요즘들어 거울을 보고 양치질을 할 때, 거울 속 나와 마주하며
샤워기 물줄기를 맞으며 눈을 꼭 감았을 때 들려오는 어지러운 물 쏟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끔씩 포기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포기해야할 방법들을 고민하고, 포기해야 할 시점을 고민하게 된다.
20년에 걸쳐 줄기차게 포기하는 방법만을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나를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곳을 걸어가다 가끔씩 나에게 나지막히 말을 걸어 나 스스로를 욕하고 혼내보기도 하고
몸을 가눌 수 없을만큼 진탕 술에 취해서 먹은 것을 다 토악질 하며 나를 괴롭혀 보기도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에서 도망치고 싶다.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이 답답한 마음가짐을 털고 진절머리 나는 중력이 뻗치는 곳에서 벗어나 있고 싶다.